의렬단의 독립전쟁, 의열단 단장 김원봉과 조선의용대 재조명

집에서 즐겨보는 'SBS스페셜'이 결방하고 2019년 새해를 맞아 3.1운동 및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해 신년특집 다큐멘터리 '의렬단의 독립전쟁'을 방송을 했어요.


6일 방송하는 SBS 신년특집 '의렬단의 독립전쟁'에서는 금기의 이름이 되었던 김원봉, 중국에 종속된 군대로 폄하당해야 했던 조선의용대, 그리고 역사에 이름 한 줄 없이 사라진 애국 청년들을 재조명했어요.


의열단 김원봉


중국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 불리며 외지고 험준하기로 이름난 태항산맥 태항산의 오지마을 운두저촌에 의미있는 조선말이 새겨져 있어요.


"왜놈의 상관놈들을 쏴 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 오시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


한글을 알지도 못하는 마을주민들이 몇 번이고 덧그리며 보존해온 누군가의 외침, 그것은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던 독립전쟁의 증거였어요.


의렬단의 독립전쟁


일제를 떨게 한 이름 '의열단', 의열단을 이끌던 김원봉은 당시 나이로 스물여섯, 일제는 왜 그토록 그를 두려워했을까요?


이에 전문가는 "지금보다 10년 정도는 의식 세계가 앞서 있었다고 봐야 한다"고 그를 평가했어요.


의열당 김원봉


의열단은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된 무장 독립단체로서 암살 대상에 대담하게 접근해 같이 폭사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해요.


이들은 5파괴 7가살 단순하지만 강렬한 지침을 가지고 활동하며 한반도 전역을 뒤흔들었어요.


의로운 일을 맹렬히 행한다는 뜻을 의미하는 의열단은 종로경찰서 폭파로 일제 조선통치의 심장부를 겨누고 경성 시내로 대규모 폭탄반입 작전을 펼치며 식민통치의 근간을 흔들었어요.



1926년 의열단은 돌연 행적이 묘연해졌는데 의열단의 흔적이 다시 발견된 곳은 중국 난징이었어요. 일본의 야욕이 대륙으로 뻗어가기 시작한 시기에 의열단 단장 김원봉은 '우리의 군대가 필요하다'는 결단을 내리게 되요.


동북아의 화약고를 자처한 일제가 곧 궁지에 몰릴 것을 미리 내다 보았고 의열투쟁에서 무장투쟁으로 노선을 바꾼거에요.


당시 중국 최고의 군사 양성소인 '황포군관학교'에서 특별 훈련 과정을 수료한 그들이 난징의 한 외딴 사찰에서 비밀스럽게 최정예 군사들의 훈련장소로 '조선 혁명 군사정치 간부학교'를 만들어 훈련했어요.


조선의용대


중일전쟁 발발 후 국민당 장개석의 지원으로 의열단은 1930년대 이후 최초의 정규군사 조직 '조선의용대'로 재탄생하게 되었어요.


중국군에 협력해 싸웠으나 조선의용대의 목적은 오로지 독립이었어요. 외국어와 첩보전에 능숙했던 이들은 적진에 방패연을 날려 전단을 살포하거나 적군 가까이 다가가 확성기로 심리적 교란을 일으키는 함화공작을 펼치는 등 초기에는 선전부대로서 맹활약했어요.


병력의 확연한 열세에도 승전을 거머쥔 호가장 전투, 그리고 4만의 일본 대군에 맞서 패전의 위기를 넘겼던 반소탕전까지 투쟁의 역사, 독립전쟁의 절정의 순간들이 태항산 자락에 그대로 남아있어요.


김원봉


조선의용대는 일제가 패망하는 최수의 순간까지 싸우다 전장에서 해방을 맞았어요.


독립전쟁의 승리를 맞은 의열단과 김원봉은 26년 만에 국내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그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의열단 단원과 희생당한 단원들의 가족을 만나 위로하고 미안한과 감사의 마음을 전했어요.


방송 말미에 누구보다 맹렬했던 의열단의 존재를 잊어가는 현실에 아쉬움을 전하며 지금이라도 우리가 제대로 이들을 평가하고 알려야 한다고 전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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